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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문제 많은 초대교회 전태식 목사
“잘못된 사상 계속 퍼뜨려 … 지도받거나 수정된 적이 없어 보여”
newsdaybox_top.gif2014년 09월 15일 (월) 10:30:36이인규 권사 btn_sendmail.gif dsmedic@naver.comnewsdaybox_dn.gif

이인규 권사 / 평신도 이단 대책 협의회 대표

목차 
1. 교회는 성전이 아니며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은 교회론의 기초이다. 
2. 목사 중심주의, 목사는 구약의 선지자나 제사장이 아니다 
3. 헌금과 예물을 강요하는 사이비성 문제 
4. 이단들의 주장과 같은 알레고리적인 성경 해석 
5. 구원론의 오류 
6. 율법주의와 행위 구원론


초대교회 전태식 목사는 예장통합, 합동, 고신에서 참여 금지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문제점들을 모두 수정하고 고치겠다고 약속하였고, 교단에서 지도를 하겠다고 하여 한기총에서 발간하는 이단 사이비 명단에서 빼주었고, 예장통합에서 풀어주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전태식 목사는 전과 동일한 주장을 계속적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최근에는 두 날개와 비슷한 양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보다 더 체계적으로 잘못된 사상을 퍼뜨리고 있다. 

1. 교회는 성전이 아니며,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은 교회론의 기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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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규 권사
    객원칼럼니스트

교회를 구약의 성전과 같은 장소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잘못된 교회관과 교회중심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전태식 목사의 주장은 교회론에 대한 명백한 오류이며, 구약의 모형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주장이다. <아바드성경>에서 이러한 오류는 수없이 발견되는데, <다윗의 길> 104-136쪽과 198-227쪽도 그러한 내용이 있으며, <아바드리더시스템> 청지기반 4과 30-39쪽도 교회 중심과 목회자 중심을 설명하고 있으며, 또 <예배론> 130-168쪽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전태식 목사의 단순한 실수나 무지라기보다는 뿌리 깊게 박혀있는 신학적인 오류라고 생각되며, 그동안 지도를 받거나 수정된 적이 없어 보인다. 특히 이러한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교회론을 적용하려는 목적이 교인들에게 교회가 성전인 것처럼 주입시켜서 교회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고, 교회로 물질과 헌금을 바치도록 강요하려는 고의적인 의도로 보인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로서 ‘에크’(...로부터)와 ‘콜레오’(부르다)의 합성어이다. 즉 교회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회중’을 뜻한다. 

신약 시대에는 거룩한 장소, 즉 성전의 개념이 없어졌다(마 18:20, 고전 3:16, 엡 2:21-22). 물론 구약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곳(성전)이 따로 있어서 오직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어느 곳이든지 성도가 모인 곳이 성전이요,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신 성도의 몸이 곧 성전이다(고전3:16). 또한, 예수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라고 하셨는데,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라고 말씀하셨다. 

2. 목사는 구약의 선지자나 제사장이 아니다 : 

주의 종의 허물을 덮어주면 축복을 받고, 주의 종을 비난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거나 주의 종에게 쓸 것을 공급하여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목사에 대한 대우를 축복의 조건으로 해석하는 심각한 오류이다. 특히 구약의 지도자나 선지자, 제사장 등을 주의 종으로 해석하거나, 신약의 사도를 목사로 적용시키고 있다. 

<아바드성경> 뿐 아니라, <다윗의 길> 261-283쪽을 보면 그 제목이 ‘(1) 주의 종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2) 주의 종의 허물이나 잘못을 덮어주라 (3) 주의 종을 보호하라 (4) 주의 종에게 쓸 것을 공급하라’라고 기록하고 있고, <아바드리더시스템> 청지기 7과 25-42쪽에도 목회자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아바드리더시스템> 용사반 1과 24-27쪽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더욱이 노아의 하체가 드러난 것을 말했던 함이 저주를 받았고, 하체를 덮어주었던 셈과 야벳이 축복을 받은 것을 비유하여, 목사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주면 축복을 받는 것으로 황당한 해석을 하고 있다. 

오늘날 목사가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 용도는 자기 자신을 낮추는 호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주의 일을 하는 모든 자가 주의 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노아와 같은 지도자, 선지자, 사사, 제사장 등은 오늘날의 목사가 아니다. 전태식 목사는 ‘주의 종’이 상당히 높은 직분으로 착각하고, 주의 종을 대적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하는데, 아래 성경구절을 읽고 하나님의 자녀를 대적하면 어떻게 되는지부터 생각하기 바란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1-7, 참고: 롬8:15-17).

<아바드성경> 창18:5 (20쪽) :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한 것을 “주의 종을 대접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계속 이렇게 성경 구절을 주의 종(목사)의 경우로 적용시키는 것은 자가당착적인 해석으로 거부감이 들게된다. 이러한 이상한 비유는 아바드성경에서 수없이 나타난다. 히브리서 13:2는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라고 말한다. 

<아바드성경> 106쪽 B(16:8) : 모세를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인용하여, 주의 종을 원망, 비방,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 비방, 대적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아바드성경>에서 수없이 반복적인 목사에 대한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다. 

<아바드성경> 116쪽 (22:28) :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과연 재판장이 목사를 말하는가? 본문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엘로힘”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구약 고대의 재판장의 권세가 하나님께로 온다는 의미와 함께, “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재판장을 목사로 해석한다는 것은 주의 종을 신격화하여 욕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목사 중심주의가 된다. 

<아바드성경> 119쪽 25장 (출 25:2) :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구약에서 예물을 가져오라는 구절을 모두 교회의 예배에서 물질을 바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교회론의 오류임과 동시에 불건전한 주장이다. 예배는 물질이 아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며, 구약의 제사와 다르다. <아바드성경>은 물질과 헌금을 교회로 바치는 것과 목사를 비방하지 못하며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축복을 받는 것으로 반복하고 있다. 

<아바드성경> 124쪽, D 출 28:2-3 :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제사장의 옷을 지어주는 것과 오늘날 목사의 쓸 것을 공급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본문은 모세에게 아론의 옷을 지어주라는 것이다. 계속 반복되는 치명적인 교회론의 오류이며, 목사 중심주의적인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다. 특히 주의 종을 공궤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주장은 목사를 신격화하는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바드성경> 민수기 209쪽 D(8:19) : “레위인을 취하여 아론과 그 아들에게 선물로 주어서....” <아바드성경>은 본문을 담임 교역자에게 부교역자를 선물로 준 것으로 비유하여 해석하고 있다.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더욱이 레위인을 부목사로, 아론을 목사로 해석하는 것은 웃을 수 없는 해석이다. 

<아바드성경> 열왕기하 561쪽 F 왕하 2:23-24 :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아바드성경>은 엘리사를 조롱하다가 죽임을 당한 아이를 주의 종을 비방하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바드성경>은 이러한 목사 중심주의와 목사를 신격화시키는 설명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지적하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전태식 목사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몸이 되시는 분은 목사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3. 헌금과 예물을 강요하는 사이비성 

<아바드성경>을 보면, 교회의 물질에 대한 헌금을 임마누엘(하나님과 함께 하는)의 조건으로 지나치게 언급하는 것도 거부감이 들며, 예배를 예물을 드리는 방편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건전한 사이비적인 주장으로 보여진다. 심지어 회개도 예물을 바쳐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신약의 예배를 물질과 예물로 바쳐야 된다고 적용하는 것은 종교를 빙자한 금전 갈취의 목적이 있다고 보여진다. 구약의 제사는 짐승을 바치는 희생제사였다. 이러한 구약의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는 것은 신약에서 단번에 온전히 드려진 예수님의희생 제사를 부정하는 이단적인 주장이 될 수 있다. 

<아바드성경> 외에도, <예배론> 179쪽을 보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마6:19-20)는 구절에서 하늘이 교회인 것처럼 해석을 하고 있으며, <예배론> 180쪽을 보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그리로 침입 하느니라”(눅16:16)에 대해서 전태식 목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 이후부터 주의 이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물질로 천국을 침노할 수 있게 된다”라는 황당한 성경 해석을 하고 있다. 과연 본문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예물을 드릴 수 있으며 드리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드릴 수 있다”는 뜻인가? 이러한 주장 역시 <아바드성경>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며, <예배론> 160-187쪽까지는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216-241쪽까지 예물의 종류를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 대부분을 구약만 인용하고 있다. 

<아바드리더시스템> 청지기반 9과 68-83쪽에도 예물에 대한 내용이고, 성장반 4과 55-79쪽도 예물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부요케 하여주신다는 내용이다. 또한 핵심반 11과 67-101쪽도 물질생활에 대한 내용으로 위와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진다. 
<아바드리더시스템>11과 80-101쪽에도 성전을 건축할 것, 주의 종에게 쓸 것을 공급할 것, 예물의 종류를 언급하고 있다. 

<아바드성경> 150쪽 회개와 회개 예물 : <아바드성경> 151쪽에서 죄와의 단절을 “회개의 예물”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킴이며 방향 전환을 말하는 것으로서, 회개는 예물과 아무 상관이 없다. <아바드성경>은 신약 시대에도 “죄와의 단절을 결단하는 의미로서 회개 예물을 드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예물을 드려야만 회개가 된다는 주장은 사이비성 주장이며, 예물을 바치지 않으면 죄와 단절이 되지 않거나 죄사함을 받지 못하는가? 

<아바드성경> 122쪽 H 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 하느니라” 
이 성경 본문을 <아바드성경>은 123쪽에서 “원하는 대로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고의성이 있는 이상한 해석이며, 비상식적인 해석이다. 십자가 대속으로 휘장이 찢어진 것은 성도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만인 제사장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도들이 하나님께 직접 원하는 대로 마음껏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자체가 심각한 물질주의적인 해석이 된다. 동일한 내용의 동영상 설교도 발견된다. 

<아바드성경> 7쪽, 마6:3 :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 제자나 사도들, 곧 주의 종이나 교회를 통해 구제하는 것이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구제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이상한 해석을 하여 개인적인 구제도 교회를 통하여 하라는 것은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 

4. 이단들의 주장과 같은 알레고리적인 성경 해석 

비논리적인 알레고리적인 풍유적인 성경 해석과 논리성이 전혀 없는 성경 해석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베뢰아와 신천지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이 나타난다. 

(1) 이중 아담론 

<아바드성경> 1-2쪽은 창세기 2장7절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에 대해서 “사용된 흙의 연대는 몇 억만 년 전이 될지 짐작하기 어렵고 이를 통한 사람의 연대 역시 추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령으로 만드신 때는 사람의 연대를 헤아려 볼 때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흙으로 사람을 만든 것은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것이지만, 사람을 생령으로 만드신 때가 6000년 전이라는 이중 아담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베뢰아와 신천지의 주장이다. <아바드성경>은 (2쪽) 창2:8의 에덴동산을 교회로 비유하며, 거듭난 사람은 세상에 두지 않고 교회에 두신다는 해설을 하고 있다. 생령을 성령으로 해석하여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특히 <아바드성경>은 “생령이 된지라”(창2:17)의 생령을 성령으로 해석하는데 본문의 “생기”라고 번역된 단어는 “네솨마 하이”로서 “네솨마”는 “호흡”을 뜻하며, “하이”는 “생명”을 뜻하는 단어로서, 즉 생기는 “생명의 호흡, 숨”을 가르킨다. 
또 본문 창2:7의 뒤에 있는 단어 “생령이 된지라”를 “영적 존재가 되었다”고 해석을 하는데, 생령은 히브리어가 “네페쉬 하이”(Living Being)로서 어떤 번역 성경도 영적 존재로 번역한 경우가 없으며 생물로 번역하였다. 
<아바드성경>뿐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전태식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한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사람의 육체를 흙으로 만드셨다’는 뜻이며,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흙으로 된 육체 안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으로 산 영(고전 15:45), 곧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종말론> 39쪽)

“생령”이라는 단어는 창세기1장20-21절에서는 동물과 짐승에도 사용되었던 적도 있다. 전테식 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동물과 짐승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적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네페쉬 하이"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단어가 아니며 그것을 성령으로 해석하면 아래 생물도 성령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네페쉬 하이)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창 1:20).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네페쉬 하이)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 2:19).

(2) 흙이 영혼이 죽은 사람이다? 

또 뱀이 흙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흙’에 대한 해석을 신천지와 같이 ‘영혼이 죽은 사람’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아바드성경>은 3쪽에서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어다. 뱀은 흙을 먹지 않으므로 흙은 말씀을 벗어난 영혼이 죽은 자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신천지의 해석으로써, 그렇다면 창2:19의 들짐승과 각종 새도 흙으로 만들어진 것은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 짐승과 새도 영혼이 죽은 사람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 2:19).

“흙은 먹는다”는 표현은 저주, 비하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 본문에서도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닌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시72:9 티끌을 핥을 것이며(사49:23) 
애3:29 입을 땅에 대고 있으라 
미 7:17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 하리이다 

(3) 흑암이 마귀를 가두는 곳이다? 

<아바드성경>은 흑암(창1:2)에 대해서 “창1:2의 흑암을 범죄한 천사, 마귀를 가두어 놓은 곳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베뢰아의 주장과 유사한데 베뢰아에서는 궁창이 감옥이라고 주장한다. 창세기에서 ‘흑암’은 감옥을 뜻하지 않으며, 어두움의 뜻이며, 본문에서는 아직 빛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4) 산이 교회이다? 

<아바드성경> 39-40쪽에서 마24:16장의 ‘산’이 교회라고 하는 주장도 신천지와 같다. <아바드성경>은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환란을 이기기 위해 교회 중심 곧 예배 중심으로 살라는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 마24장16절은 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을 가르킨다. <아바드성경>은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한다. 

“산으로 도망할 찌어다”(24:16) :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환란을 이기기 위해 교회 중심 곧 예배 중심으로 살라는 것이다? 
“지붕에서 내려가지 말며”(24:17) :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는 뜻이다. 
“밭에 있는 자는....”(24:18) : 성도는 하나님의 밭이므로 좋은 밭이 되라는 뜻이다.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24:19) : 아이 밴 자와 젖먹이는 자는 평소보다 오히려 신앙이 나태하기 마련이다. 본절은 이와 같이 신앙이 나태해지는 자는 결코 환란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24:20) : 겨울은 동면의 계절이며, 안식일은 노동을 쉬는 날이므로 믿음이 잠을 자거나 쉬지 말라는 뜻이다? 

(5) 방언에 대한 잘못된 주장 

<아바드리더시스템> 핵심반 7과 38-39쪽에서 “성령 세례의 표적인 방언은 무엇일까요?”라고 하며 성령 세례의 표적이 방언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방언의 올바른 사용에서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6) 새 포도주는 성령이며, 부대가 터진다는 것은 영적 다툼이다? 

<아바드성경> 13쪽, 9:17 새 포도주...부대가 터져 : <아바드성경>은 새 포도주가 약속하신 성령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본절은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과의 영적 다툼이 있을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을 한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다. 본문은 유대교의 율법적인 전통과 의식에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대한 완성이자 그 최종 목적이 된다는 뜻이다. 

(7) 행위 구원적인 해석 

<아바드성경> 166쪽 (요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아바드성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일이었지만, 수족을 메었던 베를 푸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라고 해석을 한다. 전혀 상관이 없는 본문을 사람의 행위를 강조하도록 과장하여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다. 

(8) 자의적인 황당한 해석 

<아바드성경> 창6:3 (8쪽)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3) 
<아바드성경>은 본문을 “믿지 않는 자와 함께 하면 신앙이 떨어짐을 뜻한다”고 해석하였다. 납득할 수 없는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9) 이사야서의 짝 

<아바드성경> 1004쪽 34장 A :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아바드성경>은 “빠진 것이 없고”를 “동물들이 멸망하여 황폐하게 된 에돔땅 위에 하나도 빠짐없이 거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며, “짝”에 대해서는 “이사야의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로 보며, 하나님의 말씀도 예언과 성취, 문제와 답이 기록되어있어서 내용이 부족함이 없이 완벽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본문은 “동물들이 멸망하여 황폐한 에돔 땅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거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에돔 땅에 레위기의 부정한 짐승(부엉이, 솔개등)들이 짝을 짓고 살게 된다”는 뜻이다. 짝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신천지와 하나님의교회의 주장이다. 

[공동번역]은 “이런 모든 짐승들이”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이 짐승들 가운데서”로 번역하였으며, [현대인의성경]은 “이 동물들 중에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라고 번역하였다 

(10)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다? 

<아바드성경> 146쪽 “하늘에서 내려온 자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에 대해서 <아바드성경>은 “예수님 외에 천국에 들어간 자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므로 신천지, JMS와 같은 주장을 한다. 
본문에서 “하늘로 올라간 자”는 현재완료형으로 “하늘에 계시는 분”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를 뜻하며, 앞구절 3:·12의 “하늘 일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정체성을 의미한다. 또한 사후 영혼이 가는 낙원도 천국이다. 

5. 구원론의 오류 

(1) 구원의 세 가지 분류 

구원을 죄에서 구원, 환경에서 구원, 영혼의 구원으로 분류시키고 있다. 회개와 자백을 구별하여, 자범죄를 지은 사람은 자백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마치 구원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으로서 구원파의 주장과 비슷하여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죄의 구원과 영혼의 구원을 구별하는 자체도 이상한 주장으로서 구원파의 구원과 유사하다. 

구원의 개념은 예수를 믿고 죄로부터 벗어남으로 인한 종말적인 심판까지의 과정을 의미하며, 과거적인 시제의 구원, 현재적인 시제의 구원, 장래적인 시제의 구원을 모두 포괄한다. 예수는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이며, 환경의 구원을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다. 

(2) 질병, 사고, 재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아바드성경> 105쪽 하나님의 백성이 질병에 걸리는 이유 : 
모든 질병을 하나님이 주시며, 치시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질병과 사고, 재난과 같은 악을 하나님이 모두 주시는 것인가? 그러한 관점은 구약의 사람들이 생각하던 관점으로서 모든 질병이 죄 때문으로 알았다. 
<아바드리더시스템> 핵심반 9과 10-20쪽을 보면 가난과 질병도 하나님이 주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3) 배타적인 구원관 

<아바드성경> 14쪽, 9:37,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 
천국 복음을 가르쳐 알곡 만들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은 많은데 천국 복음을 가르쳐 백성을 알곡으로 만드는 목자들이 적음을 말한다. 즉 대부분의 목자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며 신천지와 동일한 주장이다. 
마치 전태식 목사가 천국 복음을 전하며 일반 목사들은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는 배타적인 교만과 독선으로 보인다. 

6. 율법주의와 행위 구원론 : 

참된 믿음의 열매로써 실천적인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구원의 조건으로써 행위 구원론,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구원론의 오류이다. 특히 교회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이 극히 적다는 주장과 함께, 믿는 자가 행함이나 순종을 하지 않으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으며, 신약에서는 율법의 내면적인 의까지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율법의 의로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므로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으며, 예수님을 더욱 철저한 율법주의로 왜곡 해석을 하고 있다. 
특히 믿음 외에 인간적인 순종, 행함과 율법적인 의를 믿는 자의 의무나 열매가 아닌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하는 행위 구원론, 혹은 율법주의의 성향으로 흐르고 있다. 

<아바드리더시스템> 비전반 1과 17쪽을 보면, 규례가 제사법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성경에서 ‘규례’는 언제나 제사법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바드리더시스템> 비전반, 1과 28쪽을 보면 율법은 복음이라고 주장하는데, 성경은 율법과 복음을 명백하게 구별하고 있다. 
<아바드리더시스템> 비전반, 1과 34쪽에서는 시내산 언약은 신약 시대까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또 <아바드성경> 109쪽 F 율법(10:26) : 아바드 성경은 “율법은 하나님과 택한 자 사이에 맺은 언약이며, 이 언약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라고 해석하므로써 명백한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말하고 있다. 

(1) 아버지의 뜻에 대한 잘못된 성경 해석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즉 이단들과 행위 구원론자들이 이 본문을 주로 인용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천국에 가지 못하며, 자신을 따르는 교인들만이 천국에 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그들은 “교주나 목사의 뜻을 따르는 자”로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본문은 행위 구원론을 말하지 않는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무엇일까?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주의 이름으로 거짓선지자 노릇을 한 자들이 바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자라는 것을 밝히 말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아버지의 뜻”은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아버지의 뜻이 “아들을 보고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2)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에 대한 잘못된 성경 해석 

<아바드성경> 창 41장(63쪽)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 : 전태식 목사는 구원의 옷은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고, 의의 겉옷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아바드성경>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죄에서 구원, 생활의 구원, 영혼의 구원을 분리시키는 구원론이다. 그러나 ‘의’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여할 책임적인 측면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은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겉옷은 구약과 달리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가르킨다고 보아야만 한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행실’은 ‘디카이오마’이며 ‘법적 선고’를 말하며, 롬5:16-18의 ‘의롭다하심’에 사용된 단어이다. 위 본문에서 보듯이 이 세마포는 하나님이 허락하여 입게 하신 옷을 말한다. 전태식 목사는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이 다른 것으로 구별하고 있는데, 의의 겉옷도 하나님이 더하여 주시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11).

마태복음에서도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악하거나 선하거나를 막론하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었으며, 길에서 만나는 대로 초청된 그들이 예복을 미리 준비하였을 리가 없다. 그 당시 왕국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예복이 왕국에 미리 준비되었다고 한다. 즉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믿음의 의’가 없는 사람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마 22:9-12).

(3) 예수의 피로 씻음 

더욱이 전태식 목사는 의의 옷이 더러워질 수 있다고 하면서(64쪽) 항상 씻어 희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계7:14과 22:14을 인용하는데, 계시록 본문은 예수의 피로 옷을 씻는다는 것으로써, 전태식 목사는 예수의 피로 옷을 씻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사람이 항상 씻어야 한다는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다. 
전태식 목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약의 성경 구절을 모두 외면한 채 왜 일부분의 성경만을 인용하거나 본래의 의미와 달리 해석함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의지가 구원의 조건으로서 별도로 필요한 것처럼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4) 구제와 선행의 구원의 조건으로 해석 

<아바드성경> 32쪽 F 약대가 바늘 귀로....(19:24) : 
<아바드성경>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으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라고 해석을 한다. 구제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가톨릭과 같으며, 행위 구원론적인 주장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성경 본문은 구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5-26).

(5) 생명록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주장 

<아바드성경> 421쪽 C (21:27) :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에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데, 그 이름이 흐려질 수 있으며 지워지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계3:5은 “반드시 흐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흐릴 수 있다는 뜻과 반대의 뜻이다. 물론 기독교인이거나 믿는 자의 구원은 취소될 수 있다. 그러나 생명록에 이름이 기록된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이 취소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은 성령의 보증과 인치심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의 구원이 취소된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9).

(6) 순종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행위 구원

<아바드성경> 야고보서 372쪽 B 행함이 없는 믿음(2:17)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나의 주로 고백했다 할지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없다면 영혼의 구원에 이를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흩어진 유대인으로서(약1:1), 야고보서의 행함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의 조건으로서의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7) 옛 계명이 제사법이라는 주장 

<아바드성경> 히브리서 360쪽 D (히7:18) :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아바드성경>은 “전엣 계명”에 대해서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7:12의 제사 직분과 제사장 제도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히브리서에 언급되는 언약은 예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말한다. 그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비교가 되는 것이다. 어느 성경에 제사 직분과 제사장 제도만이 옛 계명이라고 말하는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

예레미야 선지자는 새 언약을 예언하였고, 히브리서의 기자는 예레미야서의 구절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유대인과의 옛 언약인 율법이 예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제사 율법과 제사장 제도만이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8:6-10).

(8) 율법주의 

① 정통 신학은 율법 폐기론도 잘못이지만, 율법주의도 잘못이라고 가르친다. 
특히 율법주의는 복음을 부정하는 이단적인 주장이다. 율법이 폐기되지 않았다는 뜻은 복음의 시대에도 계속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며, 이 세상에는 율법의 요구 충족에 달할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율법으로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율법이란 왜 존재하여야만 했을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 율법이란 죄가 무엇인지 알려줌으로서 죄를 깨닫게 함이 그 첫째 기능인 것이며, 두 번째 기능은 인간이 자력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므로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죄가 율법있기 전에도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5:13).

아직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그 뜻을 우리는 잘 새겨 보아야 한다. 율법의 기능이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인데, 죄가 있었기에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은 율법으로는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바울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고 떨어진 자라고 혹독한 비판을 하고 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5:4)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8)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율법은 폐하여 졌는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며 율법을 더 굳게 세워야 한다고 하셨다. 이 말은 지금도 율법을 지켜야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니다. 이것은 율법의 본래적인 기능, 즉 죄를 알게 하며 깨닫게 하는 역활로서 더욱 굳게 세워져야 한다는 뜻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3:23).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앞 성경 구절들은 분명히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라든지 "약속한 자손이 오기까지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또 율법의 두 번째 역할로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갈3:24-25)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즉 율법은 그리스도로 안내하는 이정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의 선물로서 구원을 얻는다. 만일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구원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 되고 말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어졌는데, 그래서 복음은 값없는 은혜가 되어진다. 복음은 어떤 죄인이라도 살릴 수 있다. 
율법과 복음은 동등한 것이 아니다. 율법은 예비적이었고 복음은 완성적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정죄의 기능을 하는 것이었으며 복음은 죄를 없애는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율법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어졌다. 

바로 그리스도가 실체가 되시며, 율법은 그림자일 뿐이다. 하나의 새롭고 완성된 법이 공표되면 예전의 법은 폐기되며, 새로운 법 안에 포함되어 지는 것이다. 법이란, 지킴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기의 죄를 알 수 있는 그런 마음의 거울인 것이다. 살인과 간음을 하지 않는다는 계명을 지킴으로서 그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인하여 살인과 간음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바울은 율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할 수가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때문이다. 더불어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참고서적
<아바드성경> (초대출판사, 2007년) 
<아바드리더시스템> 핵심반 (초대출판사, 2008년) 
<아바드리더시스템> 용사반 (초대출판사, 2008년) 
<아바드리더시스템> 청지기반 (초대출판사, 2008년) 
<아바드리더시스템> 비전반 (초대출판사, 2008년) 
<아바드리더시스템> 성장반 (초대출판사, 2008년) 
전태식, 이경은 공저 <다윗의 길> (초대출판사, 2013년) 
전태식 <예배론> (초대출판사, 2010년) 
전태식 <종말론> (초대출판사, 2010년) 
전태식의 설교 동영상 여러 편(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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