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십일조의 비밀십일조 의무화는 부패한 중세 제도의 토착화글쓴이: 신성남  |  canavillage@yahoo.com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히 10:9) 

요즘 한국 교회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중에는 상식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까마귀가 "형님" 하며 달려들 정도로 속이 시꺼먼 인사들이 알량한 가운을 입고 교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교회가 변질되고 있는 주요한 원인 중에 하나입니다.

"돈 때문에 교회가 불편하다" 또는 "교회가 돈밖에 모른다"는 탄식도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목사님들은 "교회 내에 헌금 강요란 없다"고 정색을 하십니다. 오히려 "신실한 교인들이 스스로 헌금을 잘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팎에는 '예배당'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는 분들이 수두룩합니다. 거룩한 '성전' 속에 계신 목사님들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요.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헌금 강요

사실 헌금을 대놓고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교회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여전히 증폭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실제로는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헌금 강요가 더욱 집요하게 '고도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금전적 부패가 매우 치명적인 이유는 '구조적인 헌금 강요'가 은밀하게 뿌리를 내리고 '토착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인위적이며 암묵적인 헌금 강요가 예배 속에 위장하거나, 조직 속에 숨어서 은근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선 교회 입구에 늘어놓은 '기명 헌금 봉투'가 그것입니다. 헌금자 이름을 적어서 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실까 염려하여 이름을 적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을 알리거나 알아주어 헌금을 부추기자는 의도입니다. 극소수의 신자들만이 무기명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입구(入口)에서부터 악취가 진동하건만 자신만 모르고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공개하기도 합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부끄러운 악습입니다. 연보의 본래 목적이 구제임을 감안할 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주일 예배 시간에만 있던 헌금 순서도 부흥회, 구역 예배, 헌신 예배, 그리고 기도회 등 모일 때마다 하는 것으로 점차 확대하고 있습니다. 신도들의 주머니를 마른 행주보다 더 쥐어짜고 있습니다. 물론 헌금 때마다 '애절한 헌금 기도'를 통하여 감사와 헌신과 '바침'을 강조합니다. 기도 중에는 특정 헌금자들을 호명하기도 합니다. 매주일 실속 있게 헌금 독려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헌금 채' 역시 신도들의 체면을 자극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은밀히 하는 헌금은 도저히 체질에 안 맞는 모양입니다. 결국 적은 돈이라도 반드시 넣게 만듭니다. 오늘날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니건만, 예배 중에 헌금 채를 돌리는 '바침'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물론 초대 교회 사도들의 '무공해 예배' 중에는 이런 번잡한 순서가 없었습니다.

이 외에도 교회 내에는 은근하게 헌금을 유도하거나 압박하는 유형무형의 그림자들이 존재합니다. 아마 건축 헌금을 '무기명'으로 하자고 제안하면, 목사들은 무슨 명분을 대서라도 반대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명 헌금을 해야 돈이 더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헌금을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며' 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기복 설교' 역시 간접적인 헌금 강요입니다. '복 받으려면 돈을 바쳐라'가 그런 설교의 주요 요지입니다. 목회자가 무당처럼 세속적인 복을 지나치게 추구하며 변질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물론 그런 심보로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해도, 복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중세적 헌금 강요의 토착화 

그런데 사실 위의 내용들은 서론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십일조 의무화'야말로 한국 교회 헌금 강요의 본체이며 핵심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이었으며 신약 교회에서 폐지된 제도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교회 내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헬라인이나 기타 민족 출신의 신도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유대인 고유의 율법이었던 '할례'나 '십일조'를 억지로 강요하지 않은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멀리 고린도, 안디옥, 그리고 에베소 등의 이방 교인들이 '유대 지역의 세금'인 십일조를 추가로 낼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이 유대의 십일조를 최초로 부활시킨 것은 교권주의에 잠식된 중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중세 십일조' 역시 교회의 타락과 함께 한동안 극성을 부리며 추태를 보이다가, 결국은 종교 개혁의 철퇴를 맞고 다시 사라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에는 가톨릭조차도 십일조를 의무화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약 신정 국가의 세금이었던 율법적 십일조를 오늘날에도 강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일찍이 개혁 신학자인 박윤선 목사님도 '신약 시대에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다'라고 분명한 선을 그으셨고, 손봉호 교수님 역시 같은 견해를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미국 일부 근본주의 교단과 오순절 교단을 제외한다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의 목사들만이 교파를 초월하여 '거국적으로' 단결해 이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 말라기서에는 십일조를 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할례와 다른 율법들을 몸소 지키시며 십일조 역시 바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를 부분적으로만 해석하여, 지금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억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구약 율법의 '의식법'들은 물리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통해 그 율법들이 완성되었다고 표현함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 신자들은 더 이상 구약의 제사나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제사의 목적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직을 감당한 레위인도, 성전도 더 이상 필요가 없고,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즉 십일조는 예수님에 의하여 이미 2,000년 전에 시효가 말소된 제도입니다. 역사적으로도 AD 70년 로마군의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후, '성전에서 현물을 바치던' 율법의 십일조는 유대 신정 국가와 함께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십일조에는 무슨 복잡한 사연이 숨어 있는지, 신학을 제대로 잘 배운 목사들마저도 이 문제로만 넘어오면 그 명석하던 머리가 갑자기 전기 나간 밥통처럼 이상해집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의 불과 5% 미만이 하고 있는 십일조를, 한국 목사들은 무려 95% 이상이 열성적으로 지지한다는 어느 희한한 통계 결과가 이를 잘 증명해 줍니다. 또한 '목사 공화국'인 한국에서 십일조를 반대하는 목회자들이 왜 왕따를 당하는지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거리낌이 있는지, 십일조가 '신자의 강제적인 의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한국 교회 '헌금 강요'의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신학적 논쟁을 피하기 위해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을 합니다. 그리고 십일조가 '성숙한 신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인 것처럼 분위기를 조장합니다. 이들의 말 돌림은 아주 다양합니다.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는 주장은 기본이고, "십일조를 하는 신도들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십일조를 안 하면, 그만큼 하나님이 다시 거두어 가신다", 그리고 가끔 증상이 아주 심하신 분은 "십일조를 안 하면 구원 못 받는다"고 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고 겁을 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국적 헌금 강요의 특징은 직접적이며 노골적인 강요가 아니라, 은근한 기만 속에서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강요'입니다. 그럼에도 실상은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입니다.

어떤 분들은 율법의 십일조는 거부하지만, '십일조의 정신'을 따라서 대략 '수입의 십 분의 일' 정도를 헌금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이런 '획일적' 수치화도 교회가 공식적으로 권장해서는 안 되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바리새인의 유전' 역시 같은 방식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시대'인 구약의 신정 국가에서는 싫어도 무조건 십 분의 일을 내야만 했습니다. 십일조의 '조세적 특성' 때문에 개인의 사정과는 관계없이 누구나 '일률적으로' 십 분의 일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복음 시대'인 신약 성경에서는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더 이상 신정 국가가 아닙니다. 신도들은 이미 정부에 필요한 세금을 충분히 내고 있습니다.

십일조와 연보의 변질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구약의 십일조는 토지의 소산인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등 '현물'로 반드시 성전에서 바쳤고, 연보는 '현금'으로 연보 궤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 용도와 내용이 서로 분명하게 구분이 있었습니다. 십일조와 연보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연보가 '자발적인 헌금'인 반면에, 십일조는 '강제적 세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권주의자들이 이미 시대적으로 용도가 끝난 '현물 십일조'를 연보처럼 '현금화'하여 추가로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이중 과세'입니다.

본래 한글 성경에 '헌금'이라는 용어는 단 두 번 나옵니다. 하지만 그 과부의 헌금도 '연보 궤'에 넣었으니, 결국은 연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연보'라는 용어는 14번이나 나옵니다. 원어에는 몇 가지 다른 표현으로 표기되었지만, 우리가 연보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별 어려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마 '모금(collection)'이라는 뜻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사도들이 주도한 초대 교회에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 돈이나 재물을 바치는 행위'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가난한 다른 교인들의 구제를 위한 연보'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비정기적인 모금'이었습니다. 즉 본래 연보는 제물처럼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모금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웃과 나누는 것을 예수님께 행한 것으로 간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연보'가 언제부터인지, '바친다'는 의미가 강한 '헌금'이란 용어로 슬쩍 바뀌었습니다. 연보의 참된 의미를 약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예배당'이란 명칭이 슬그머니 '성전'으로 둔갑한 것이 연상됩니다. '성전'이라는 기만적 용어를 통하여 이미 건축 헌금 모금에 큰 재미를 보신 거룩한 목사님들께서는, 돈을 더 거두기 위해 '모금'보다는 '바침'을 강조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이런 면에서 어느 분의 지적처럼, '헌금을 바친다'는 표현보다는 '연보를 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변질의 명수입니다. 연보는 헌금으로, 연보 궤는 헌금 채로, 예배당은 성전으로, 목사는 제사장으로, 주의 종은 교회의 왕으로, 그리고 '중세적 십일조'를 복제하여 '한국적 십일조'로 변질시켰습니다.

또한 본래 레위인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제정된, 십일조나 연보가 한국에서는 도리어 가난한 교인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십일조나 연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신도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방앗간에만 마음을 둔 교권주의자들이 하는 일이란 늘 이런 식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한국 교회는 더 이상 말을 돌리며 신자들을 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이든 다른 어떤 헌금이든, '헌금 강요'는 성경적 진리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이유로든 신도들에게 헌금을 '수치화하여'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무조건 강요하는 것은 사도들이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입니다.

만일 아직도 '한국의 십일조'가 성경 원리에 근거한 '바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우회적으로 변죽을 울리며 말을 돌리지 말고, 차라리 '십일조는 모든 신자의 의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하십시오.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십일조란 없습니다. 따라서 어설픈 말로 신도들을 속이지 말고, 분명한 나팔을 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도들에게 '세금처럼' 철저하게 강요하십시오. 새 신자들에게도 처음부터 솔직하게 알려 주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신도들도 고집스럽게 설득하십시오.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도 지금처럼 세속적인 복으로 유혹하며 계속 강요하십시오. 그리고 그동안 해 온 것처럼, 십일조를 열심히 했는데도 망하고, 병들고, 실패한 신도들의 실상은 깊숙이 숨기십시오. 반대로 부자 되고 성공한 신도들의 간증만을 잘 추려서 널리 떠벌이십시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십일조가 얼마나 심각하게 기복적으로, 미신적으로, 그리고 교권적으로 악용되고 있는지를 결코 잊지 마십시오. 중세 교회도 그 길을 가다가 몰락했습니다. 십일조가 아무리 교회의 살림에 긍정적 역할을 하더라도 성경적으로 정당치 못하다면, 점차 우리의 신앙을 해치고 결국은 교회 자체를 허물게 될 것입니다. 아니 한국 교회는 이미 속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거룩한 울타리 속에서 양들은 오늘도 울고 있습니다. 목동들의 털깎기에 추워서 떨며 웁니다. 이리들에게 찢기고 아파서 웁니다. 상처 입은 형제들을 보며 분통해서 웁니다. 배가 고파 울고 삶에 지쳐 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웁니다. 언제부터인지 착한 목동들은 구석으로 밀려나고, 배부른 목동들만이 웃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렸습니다. 의와 인과 신은 사라지고, 돈과 세력과 교권이 판을 칩니다. 스스로 '종'이라던 목동들이 목자를 배신하고 양들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양들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이신 예수님도 함께 우십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멸망한 예루살렘보다도 더 큰 죄악을 우리가 쌓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십일조 개혁은 목사님들께만 미룰 수가 없습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 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나서야 합니다. 목사들은 '의무적 십일조'가 필요한지 몰라도, 신도들은 결코 아닙니다. 정 하고 싶으면, 면세 혜택을 듬뿍 받고 계신 귀족 목사님들만 하면 됩니다. 신자들까지 무속적인 장단에 맞춰 기복과 권력 탐구에 동참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한국의 교권주의자들은 사도들과 개혁자들에 의해 고사된 십일조를 부활시켜 부와 권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부정한 돈은 다시 교회 대형화, 목사의 귀족화, 그리고 신도들의 맹신화를 촉진하며 교회를 변질시키는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백성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을 강요하다 멸망한 '바리새인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발적으로 하는 연보는 소중한 것입니다. 많이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입니다. 이웃을 위하여 즐겨 내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하여 준' 바른 가르침입니다. 아울러 이 나라 도처에서 적지 않은 목사님들이 이를 손수 실천하고 계신 것은 크게 감사한 일입니다.


한국 교회는 중세 교회를 세습하는 십일조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 '마음에 정한 대로' 하는 자발적인 연보를 힘써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진지한 노력은 앞으로 개혁 교회들이 크기에 관계없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좋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6~7) 



출처:   한국교회의 변절과 십일조 강요(2016 개정판, 총 69페이지)